기억 자욱을 밟아 나가려 마음을 먹은지 벌써 3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병원에 장기입원도 했었고 가슴 아픈 직장 생활로 3년을 묻어 버렸지만 다행히 치료가 잘되어서 두다리 건실해지고 - 사실 장비 울러메고 2시간 이상 걸으면 상처부위가 아파옵니다 -, 나름대로 안정적인 직장이 생겨서 필요한 장비들을 적절하게 구입하였으며 저의 취미생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으시는 어머님과 여동생의 배려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다녀가시는 곳이라 높임 말 사용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기억 자욱을 밟는 동안에는 저만의 독백이라 생각해주시고 낮춰진 말 언덕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이 동네에 대해서는 이 단어만 떠오른다. 20년이 조금 넘게 흐른 지금 이곳의 정취들이 미운 이유는 무엇일까? 화양리로 불리우는 이 곳은 지금의 잠실이나 강남역 처럼 큰 시장 - 백화점보다 큰 - 과 세종대학교, 건국대학교 그리고 어린이대공원과 어린이회관이 있으므로써 유동인구나 휴일 나들이 또는 소비도나 구매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거리 였을 것인데... 그 빼곡한 느낌이 싫은 것인지 아니면 화양리라는 지명(地名)이 미운 것인지는 지금의 나로써는 알 수가 없다.
지금부터 찾아보기로 하자.
미웠던 것 첫번째... 아스팔트
검디 검은 아스팔트들을 많이 밟았던 것이 이곳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보도블럭과 아스팔트가 인도와 차도의 구분을 지어주고 있지만 20여년전의 70년대말 80년대 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냥 흙바닥에 자갈과 아스팔트를 섞은 것을 부은 후 대형 롤러로 밀어 아스팔트의 흉내만 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버스를 타야 할때면 버스 계단이 엄청나게 높았다. 타고 내릴때 겨우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로써는 높은 벽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어여쁜 안내양 누나가 깨끗한 흰장갑을 낀 손을 뻗어 줄때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내려줄때도 보통 번쩍 들여올려 안전하게 내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팔트는 미웠다.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로 할 수 있는 놀이는 엄청나게 많았다. 아스팔트들이 골목 골목에 깔리고 아스팔트를 깔지 못하는 골목에는 여지없이 시멘트를 들이 부어댔다. 이때부터 넘어지게 되면 상당히 많이 다쳤다. 친구들도 골목에서 놀기보단 집에 돌아가 가방을 벗어 던지고 보드라운 흙땅이 널려있는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로 아이들의 놀이터에 모래를 잔뜩 넣던지 아니면 폐 타이어를 재활용한 형형색색의 고무블럭으로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를 만든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구름의 높이에 따라... 따뜻함과 차가움과 부드러움과 딱딱함 등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흙바닥은... 지금의 이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까?
미웠던 것 두번째... 이층 집
이건 미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싫었다. 마당은 점점 좁아지고 이쁘지도 않은 나무만 깔아놓고 철문은 크게 만든후 마루가 넓은 이층집에 살기 시작했다. 동비고동의 마당이 너무나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 이 때쯤이었을까? 친구집을 손으로 직접 가르키기 힘들 정도로 점점 골목 어귀를 높은 담장과 높은 집들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친구나 또래의 형,누나,동생들의 타이틀은 앞집, 옆집, 뒷집에서 위층, 아래층으로 바뀌어가고 밖에 나가서 놀기 보단 위, 아래층만 오가며 안에서만 놀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옥상은 좋았다. 넓은 옥상에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놀수 있었고 지나가는 동네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기에 마루나 내방 보단 옥상을 더 좋아했다.
미웠던 것 세번째... 학원들
산수 잘하라고 주산학원, 음악 잘하라고 피아노학원, 미술 잘하라고 미술학원, 말 잘하라고 웅변학원, 성적 올리라고 암산학원, 글씨 잘쓰라고 서예학원, 운동 잘하라고 태권도 학원... 세상에 이런 많은 학원들이 어디에 있담... 학교도 지겨운데... 80년대 초 사교육 열풍은 동네 곳곳에 학원들을 만들어 내었고 하루 하루는 친구들과 지냈다기 보단 대학생도 아닌데 매번 바뀌는 선생님들과 보냈었다.
평소에는 짜증과 불평만 늘어 놓고 매질만 해던 선생님들이 부모님만 오시면 온 갖 아양을 떨며 칭찬을 아까지 않았을 때에는 그 어린 나이에 멀미까지 느껴졌다. 정..말 미웠던 것중에 하나지만...지금 다양한 방면에서 깜냥을 입에 올리며 사회생활을 하고 새로운 곳에 대해 빨리 적응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저 학원들을 다니면서 경험으로 배우게 된 사실 임에는 틀림 없다.
미웠던 것 네번째... 먹거리들...
불량식품이라고 들어보셨는가? 용돈이란 것이 들려져서 학교, 학원등지로 내보내질 때 아아들의 주머니에서 가장 손쉽게 동전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먹거리이다. 그것도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아주 달고 색갈만 이쁜 불량식품들 말이다.
이때부터 제빵회사나 식품회사들이 커져 소매시장에서 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크래커류 라던가 빵같은 제과류를 손쉽게 사먹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불량식품의 가격보다는 비싼 것이 사실이었다. 당연히 난 그때도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 했다.
덕분에... 가지런하지 못한 치열, 양쪽 어금니는 금테가 둘러져 있다. -0-;
하지만, 비교적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여동생과 외삼촌 식구들과 가까이서 재미있게 잘 살았던 곳이라고 기억된다. 성동구 능동, 아버님의 사업이 번창하셨던 시절... 당연히 그때가 난 그립다.